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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 디자이너

독일 회사 생활 :: 행동하는 불편러들

by Hyedy 2021. 9. 16.

객관적으로 보면 전 회사도 그다지 보수적이진 않았는데 새 회사로 이직을 하고 오니 전 회사가 아주 보수적으로 느껴질 만큼 여기는 활짝 열려있다. 지원을 할 때도 유일하게 이력서에 사진을 넣지 말라고 명시해놓았던 회사다. 온보딩을 할 때도 테크 회사라서 회사 성별 비율이 남초이긴 하지만 여성을 많이 고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고 약 40개국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있다며 회사의 다양성을 자랑했다. 베를린이나 다른 도시에 비해서 함부르크에는 외국인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건지 놀라웠다.

 

전반적으로 모든 직원들이 회사를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회사를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지 으쌰 으쌰 같이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다. 다양성과 관련 주제를 이끄는 그룹, 회사 문화를 어떻게 하면 더 개선시킬 수 있을지 논의하는 그룹 등 다양한 그룹들이 있어서 언제나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별로 세미나도 열 수 있는데 주제는 자유다. 워크샵에 다녀와서 배운 것들을 공유한다든지, 왜 우리가 inclusive design을 해야 하는지 등 자신이 동료들과 나누고 싶은 게 있다면 정해진 틀 없이 자유롭게 세미나를 연다. 이런 이벤트 외에도 해커톤도 있다.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올해 두 번째 해커톤이 열렸고 나도 참여를 했다.

 

운영 방식은 일반적인 해커톤과 똑같다. 아이디어 피칭을 하고 팀원을 모아서 이틀 동안 성과를 내고 심사를 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해커톤과 다른 점은 심사위원이 따로 없고 참여한 사람들끼리 투표로 정한다. 한 개발자가 제안한 아이디어가 재밌어 보이긴 했지만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디자이너들이랑 더 친해지고 싶어서 디자인 위주의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이틀 후 다들 모여서 발표를 하는데 아주 반응이 좋았다. 우리 팀 발표하는 것까지만 보고 한 눈 좀 판 사이에 다른 팀도 벌써 발표를 다 마쳤더라. 이틀 동안 뭘 해야 할 줄도 모르고 얼레벌레 하다가 끝난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다음번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날도 별 다를 거 없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내 메신저에 장문의 사과글이 올라왔다. 내용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전날 발표 마지막 슬라이드에 첨부된 이미지는 자신이 생각 없이 넣은 이미지이며 불쾌했을 모든 사람들에게 사과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류 글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해당 직원의 해커톤 팀 발표 마지막 장에 '직원들을 행복하게 만들자!' 이런 게 있었는데 같이 사용된 이미지가 상의를 올려서 가슴을 노출하고 있는 여성의 뒷모습, 그것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 남성 직원들이었다고 한다.

 

뒤에서 뭐 저런 걸 넣었냐 욕하고 넘어갈 수 도 있고 유머로 보라고 별 거 아닌 걸로 유난이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 화면을 보고 불쾌감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당사자에게 개인적인 메시지들을 보냈고 그래서 그 직원이 다음날 모두에게 사과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앞으로 다들 이미지 넣을 때는 한 번 더 생각하고 신중히 넣을 것이다. 이전 회사에서는 불쾌한 일이 있어도 딱히 뭔가를 하진 않았는데 여기서는 다들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위기라서 너무 좋다. 이렇게 불편한 건 불편하다고 나서서 말하는 사람들 덕분에 회사 문화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거고 그 혜택은 불편러들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나까지도 다 받게 된다. 이번에는 무임승차했지만 다음엔 나도 꼭 적극적으로 나설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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